많은 사람이 성취 과정은 쉬울수록 좋다고 여긴다. 그 과정이 쉬울수록 성취 속도도 빠를 것이라고 오해한다. 이는 '빠른 길'과 '쉬운 길'을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은 결과다. 다음의 두 사례를 보자.
첫 번째, 일곱 살이 된 어린아이가 이제 막 운동화 끈을 매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엄마가 옆에 앉아 끈 묶는 방법을 보여주며 천천히 설명해도, 혼자 그 일을 처음 시도해 보는 아이는 제대로 따라 하기가 힘들다.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아이는 제 마음처럼 쉽게 맬 수 없는 끈을 보며 짜증을 낸다. 이때 부모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두 번째,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받아쓰기 시험을 대비해 공부하고 있다. 아이는 엄마가 불러주는 단어를 노트에 쓰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는 아이의 맞춤법이 틀렸음을 발견한다. 이를 지켜보던 부모는 틀린 것을 바로 잡아주는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오류가 있는 부분을 바로 지적한다. 이때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이들은 어른의 행동을 보고 따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을 '쉽다' 고 착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또래 아이가 서툰 모습으로 신발 끈 매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신발 끈을 매는 부모의 모습만 봐왔을 뿐이다. 너무도 쉽게 문제를 해결하는 부모의 모습을 본 아이는 운동화 끈을 매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먼저 신발 끈을 제대로 매지 못해 짜증내는 아이에게는 "천천히 해도 돼" "원래 어려운 거니까 시간이 걸려도 괜찮아"라고 말해줘야 한다. 이때 엄마가 운동화 끈을 대신 매어주거나 채 족하는 말을 쓰는 것은 좋지 않다. 나는 신발 끈을 처음 매는 아이에게 "지금 겨우 1분 해보고선 안 된다고 투정 부리는 거니? 원래 신발 끈 매는 방법을 배우려면 두 달은 걸린단다"라고 말했었다.
물론 이런 교육 방식이 쉬운 건 아니다. 특히 배움의 과정을 강조하는 '제대로 된 학습'은 사라지고 속도만 강조하는 학습법이 대세인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이든 부모든 빠르고 가장 쉬운 공부법만 찾으니 조금이라도 어려운 과정에 접어들면 이를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다.
어려운 학습 과정이 쉬운 학습보다 좋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기 어려워하는 부모들을 위해 몇 가지 심리학 연구를 통해 증명해보고자 한다.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나는 진학하고 싶은 학교의 분위기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몇몇 학교를 탐방했었다. 그중 하나가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였는데, 그곳에서 나는 뇌과학게에서 가장 유명한 환자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MIT를 같이 방문한 친구들과 함께 거의 70세에 이른 그와 악수를 하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우리의 질문에 완벽한 대답을 들려주었고, '뇌과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환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 문제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우리는 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약 1 분정도 지난 후 그가 있는 방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는 우리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우리와 다시 악수를 나누고 좀 전과 비슷한 종류의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바로 '환자 H. M. Henny Gustav Molaison, 1926-2006' 이라는 이니셜로 널리 알려진 헨리 구스타프 몰래슨이었다.
1926년에 대어난 H. M. 은 어린 시절 자건거 사고로 간헐적 발작을 겪게 되었다. 청소년이 된 후 점점 심해진 발작은 그의 일상생활조차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1953년, 27세의 H. M. 은 뇌 수술을 위해 수술대에 오른다.
수술을 집도한 신경외과 의사 스코빌Scoville 은 H. M. 에게서 발작을 일으키는 요인을 없애기 위해 뇌에서 내측측두엽 temporal lobe을 제거했다. 수술 후 H. M. 의 발작 증세는 완화되었고 지능, 감각, 운동 기능 등도 모두 정상이었지만 기억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 무엇도 30초 이상 기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인지심리 분야의 연구자들은 H. M. 덕분에 기억이 두 종류로 구분됨을 알게 됐다. 단기 기억short-term memory과 장기 기억 long-term memory이 바로 그것이다. 단기 기억은 몇 초에서 몇 시간 정도의 경험이나 정보를 유지하는 기억이고, 장기 기억은 한계 없이 평생 지속되는 기억이다.
나는 가끔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묻는다. "고등학교 때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그러면 많은 학생이 손을 든다. 그다음에 "고등학교 때 배운 내용, 시험에 나왔던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라고 하면 손을 드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학습에 비해 감정과 관련된 일들은 쉽게 기억에 남지만, 학교 공부는 감정과도 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장기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학습은 방법이 무엇일까? 그런 방법이 존재하기는 할까?
우선 장기적으로 기억하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혹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공부한 내용을 기억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그 기억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내용 모두를 지금까지 기억하는 어른은 없지 않은가? 이런 기대 자체가 공부에 대한 의지를 저하시키고 큰 실망감을 불러올 수 있다.
단기적 목표와 장기적 목표
많은 부모가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느 18세까지는 아이가 오직 시험에 나오는 지식을 중심으로 기억하길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18세라는 나이는 인생의 시작도 아니고 끝 또한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로지 대학 입학만이 학습의 이유가 되어버리면 부모뿐 아니라 아이까지도 장기 기억을 목표로 여기지 않게 된다. 대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시험 성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기적 학습 목표와 장기적 학습 목표를 함께 고려하기 위해 늘 노력한다. 두 목표 모두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상황에 따라 이 둘은 가끔 상충되기도 한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보자.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가정했을 때, 아이와 부모가 같은 목표(콩쿠르 입상, 피아노학과 입학 등)를 가지는 경우보다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가령 피아노 치는 행위에 재미를 느낀 아이는 즐기는 것을 목표(장기적 목표)로 삼지만, 부모는 단순히 즐기는 것을 넘어 '인정받을 만한 곡을 연주할 수 있는 것'을 목표(단기적 목표)로 한다. 이러한 목표를 가진 부모는 경연대회나 연주회 입상을 위해 아이에게 쇼팽이나 베토벤 곡을 중심으로 강도 높은 연습을 시킨다. 대회 입상은 대학교 합격 가능성을 높이는 스펙이 될 수 있으니 아이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여기며 말이다.
나는 주변에서 이런 식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아이들을 정말 많이 봤다. 이런 상황의 아이들은 부모와 끊임없이 싸운다. 그런데 신기하게 연습을 게을리하진 않으며, 열심히 노력한 결과를 바탕으로 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결과도 얻는다.
아이들이 중도포기 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건 좋은 현상이나, 문제는 과정이다. 부모의 강요로 연주회를 준비한 아이들은 대부분 한번 성공한 뒤엔 두 번 다시 피아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단기적 목표를 성취했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의 단기적 학습 목표와 장기적 학습 목표 모두를 고려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학교 공부도 이와 비슷하다. 단기적 목표로 보면 시험 중심의 공부는 분명 훌륭한 학습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을 잘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장기적 목표를 위한 학습 방법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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