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리딩: 샅샅이 살펴보고 끊임없이 질문하라
슬로리딩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속독을 하는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빨리 읽을수록 언어능력 상승효과가 낮다면 반대로 책을 샅샅이 곱씹으며 읽을수록 언어능력 상승효과가 커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확신이 들었지만 슬로리딩을 논술 수업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들에게 천천히 읽을수록 좋다고 강조하는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일본의 나다 중학교의 국어 교사였던 하시모토 다케시의 <슬로리딩> 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읽는 독서법을 이미 오래전에 교육 현장에 적용해 큰 성공을 거둔 분이 계셨던 겁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제가 짐작한 것 이상으로 컸습니다.
나다 학교는 지방 소도시에 있는 그저 그런 학교였습니다. 대도시 아이들에게 열등감을 가진, 거친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학교가 어느 날 갑자기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가 되었습니다. 나다 학교가 도쿄대학교 합격생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한 해만 그런 게 아니라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같은 결과가 계속 이어졌으니 일본 교육계가 발칵 뒤집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매스컴이 나다 학교를 취재하면서 남다른 교육법의 실체가 밝혀졌습니다. 바로 하시모토 다케시 선생의 나다 중학교 국어 수업이었습니다.
다케시 선생의 국어 수업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일단 교과서로 수업하지 않습니다. 대신 나카 간스케의 <은수저>라는 소설 책 한 권으로 중등 3년간의 국어 수업을 합니다. 수업 방법은 이렇습니다. 책을 부분 부분으로 나눠 수업시간마다 조금씩 읽어오게 합니다. 이 방법의 1차적인 효과는 책을 싫어하는 아이도 읽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소설책 한 권을 잘게 나누기 때문에 매주 읽어야 하는 독서량의 부담이 거의 없습니다. 수업시간에는 이 짧은 분량을 한 문장 한 문장 샅샅이 살펴보면서 분석하고 의견을 나눕니다. 사소한 표현부터 등장인물의 심정, 상징,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옛 풍속까지 그야말로 모든 요소를 이 잡듯이 뒤집니다. 심지어 소설에 등장한 음식을 수업시간에 먹어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소설 한 권을 느린 속도로 샅샅이 파헤치는 것은 엄청난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냥 읽었을 때는 도저히 생각해볼 수 없는 깊이로 소설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독서의 경험은 독서의 질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립니다. 다른 책을 읽을 때도 소설의 요소요소를 더 깊고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도 다케시 선생은 학생들에게 <은수저> 외에 한 달에 한 권 자유 독서를 하게 했는데, 이 한 권 한 권의 독서의 깊이가 학생들의 언어능력을 엄청나게 끌어올렸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다케시 선생의 제자들은 그 언어능력의 힘으로 명문대에 진학했고, 더 나아가 고위 공무원, 유명 문학가, 대학 총장, 정치인, 대기업 임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2018년부터 우리나라 전국 초중고에서도 '한 학기 한 권 읽기'가 시행됩니다. 슬로리딩이 제도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시작되는 터라 여러 가지 시행착으로르 겪게 되겠지만 한 가지 방법만 명심하면 그 어떤 수업보다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사사건건 '왜?' 라고 묻는 것입니다.
단어와 문장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방법은 필사를 다룰 때 살펴보고, 여기서는 구성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이야기는 플롯이라는 기본 뼈대를 가집니다. 그런데 이 뼈대는 단순히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뼈대 아래에는 이야기의 주제를 드러내는 상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동화나 청소년 소설, 장르 소설은 이 상징을 읽어내기가 비교적 쉽고, 성인들이 읽는 본격 소설이나 고전 명작은 이 상징이 깊고 은밀한 경향을 띱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만 읽으면 그 작품을 완전히 잘못 읽는 경우도 생깁니다.
예를 들어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 를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로만 읽으면 'B-612 행성의 외계인 어린 왕자가 까탈스러운 장미를 떠나 우주여행을 하다가 지구까지 왔고,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어린왕자>는 동화적이고 예쁜 이미지로 가득하지만 좀 괴상하고 지루한 책이 됩니다. 이야기의 진가를 알려면 기본적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읽어야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이렇게 시작했을까?"입니다. 앞서 작가들이 첫 문장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 문장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건 곧 첫 문단, 첫 단락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걸 뜻합니다. 이야기의 핵심을 압축해서 숨겨두거나 그에 준하는 화두를 감춰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하고 독자에게 예고 내지는 선전 포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선전 포고를 잘 해석하면 일단 절반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첫 단락을 읽고 나면 멈춰 서서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왕자>를 읽는다고 해봅시다. 도입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린 시절, 화가가 꿈이었던 '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렸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모자라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그림을 알아보지 못한 데 실망해 화가의 꿈을 포기했다.
이걸 겉으로만 읽으면 좀 이상하고 심심한 도입부가 돼버립니다. 제목이 <어린왕자>인데 어린 왕자 얘기는 한마디도 안 나오고, 무슨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예감도 들지 않습니다. '화가의 꿈을 포기했군' 하고 심리적으로 완결돼버립니다. 아이들이 <어린왕자>를 재미없어하는 것도 다 이렇게 겉으로만 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도입부에 핵심이 숨어있다고 생각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왜 이렇게 시작했을까?'라는 질문을 품고, 이 첫 단락이 작가의 선전 포고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내용을 살펴봅시다. 생텍쥐베리가 <어린왕자>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어린 시절'입니다. 생텍쥐베리는 누구나 갖고 있었지만 자라면서 읽어버리게 되는 어린 시절의 마음, 진짜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거라고 이 도입부를 통해 독자에게 선전 포고를 하는 겁니다. 이 선전 포고를 이해한 채 다음 단락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린이 되어 비행기 조종사가 된 '나'는 사막에 불시착한다. 그곳에서 '나'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 어린 왕자는 B-612 행성에서 왔다며 자기 행성의 바오밥나무를 뜯어 먹을 양을 그려달라고 한다. '나'가 양을 그려줄 때마다 어린 왕자는 '이 양이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나'가 상자를 하나 그려주며 이 안에 양이 있다고 하자 어린 왕자는 '바로 이 양'이라며 기뻐한다.
어린 왕자의 정체를 눈치채셨나요? 만약 그렇다면 혼자서도 슬로리딩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얼추 된 분입니다.
'이 단락을 왜 썼을까?'라는 생각 외에 또 주요하게 사색해야 하는 것은 등장인물의 직업과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왜 비행사일까?', '왜 사막일까?' 하고 질문을 던져야 하는 거죠. 비행사는 하늘을 나는 직업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오늘날의 히어로(hero)물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언제나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꿈을 꾸어왔습니다. '나'는 현실에 발붙이고 살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꿈을 꿀 수 있는 직업, 중력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직업, 비행사를 선택했습니다. 비록 화가라는 꿈은 포기했지만 '나'는 꿈을 꾸고 싶은 낭만적인 인물인 거죠.
그런데 비행사인 '나'는 사막에 붏시착하고 그곳에서 어린 왕자를 만납니다. 사막은 사방을 둘러봐도 모래뿐인 곳, 세상과 뚝 떨어진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곳에 있는 유일한 사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사막에서 만난 어린 왕자는 바로 비행사 자신인 겁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나'가 아닌 내 마음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 진짜 나 자신,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릴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오롯한 나 자신 말입니다.
어린 왕자는 '나'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합니다. 어린 왕자가 원하는 것은 당연히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같은 그림이었죠. 그런데 이미 어른이 된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양을 그립니다. 양을 넣은 상자 그림을 그렸을 때 어린 왕자는 비로소 기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릴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어린 왕자니까요.
슬로리딩은 이렇게 이야기의 요소요소를 깊이 사색하는 독서입니다. 책을 읽다가 멈춰서는 순간이 많은 독서지요. 슬로리등은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왜 이 인물은 이런 직업을 가졌을까?'
좋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답을 이치에 맞게 찾아내는 것. 이 과정에서 아이의 사고력이, 언어능력이, 상징을 읽는 눈이,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마음이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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