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에 있어서만큼은 한국보다 미국이 훨씬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게 사실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물론 타문화를 직.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새로운 통찰력도 얻는 등 다양성은 사람들에게 많은 이점을 준다.
어린 시절,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다양한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나라를 소개하고 음식과 문화를 공유하는 인터내셔널 데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나는 이 행사에 한국 음식을 만들어서 가져갔는데 이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요리법을 물어보며 흥미를 보였다. 또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만난 사람들은 미국 교포로서 내가 거쳐온 삶에 흥미를 가지며 이떻게 살아왔는지 물어보곤 한다. 나는 종종 '이렇게 새로운 친구들을 계속 만날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재미있을까?'라는 상상에 빠진다. 이러한 만남 속에서 내가 가진 고유의 무언가를 남에게 보여주거나 가르쳐줄 때 큰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 모든 사람을 만나거나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우리를 고정관념에 빠지게 만든다.
여자는 수학에 약하다는 속설은 거짓이다
어떤 종류의 고정관념을 가진다는 것은 특정 유형에 관한 범주를 만든다는 말과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작고 하얀 털을 가진 동물을 처음 본 후 이를 '강아지'라고 학습했다면 하얀 털을 가진 작은 고양이에 대해서도 '강아지'라고 반응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범주화 과정도 빨라진다. 범주화는 개념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러한 범주화 전략은 뇌의 자동처리 방식(대상의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통해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는다. 때로는 한 번의 학습만으로도 고정관념의 범주가 정해지기도 한다. 아기가 '아빠'라는 단어를 배운 후 한동안 눈앞에 보이는 모든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고정관념의 범주를 정하는 과정은 특별한 능력이나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많은 범주를 생성하고 사용한다. 주어지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엔 이런 범주화적 판단이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특정 집단이나 단체와 관련될 경우 문제가 생긴다. '저 범주에 속한 사람들 모두 똑같이 저럴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이 선입견을 만드는 것이다. 가령 어느 한국인이 직장에서 만난 미국인과 대화가 잘 통하지 않거나 문화적 차이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는 '미국 사람은 말이 안 통하는 존재'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특정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거나 판단을 내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혹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이러한 고정관념적 범부를 만드는 경향이 높게 나타난다.
사람과 관련된 고정관념의 범주화는 사실과 다른 경우가 꽤 있다. 고정관념의 피해자 중 상당수가 여성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미국 사람들 대부분은 '여성이 남성보다 수학을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실제 미국 초등학생 중 상당수의 여학생은 수학을 배우기도 전에 스스로 수학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자신이 수학을 못한다고 믿기에 수학 문제만 보면 긴장하고 관련된 과목은 선택조차 않으려 한다. 미국에 '수학 공포증'이라는 병이 돌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어린 시절부터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었던 탓에 한때는 '나도 여자라서 수학을 못하는 건가?'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수학보다 서툰 영어가 더 큰 문제였다. 아이러니하지만 덕분에 수학에 대해서만큼은 자신감도 자존감도 떨어지지 않았다. 많은 연구 결과 수학은 성별에 따른 차이가 없을 뿐더러 학업 성적도 여성이 우세한 게 증명됐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여러 이유와 속설로 여성과 수학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겨버린 것이다.
대학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의 대학에서 강의할 당시, 시험 직전이면 유독 많은 여학생이 내 연구실에 찾아왔다. 연구실을 방문한 여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걱정스런 눈빛으로 "저는 원래 수학을 못하는 사람이에요"라고 고백했다. 이런 여학생들은 수학에 관심이 있음에도 일단은 수업을 피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고정관념의 범주화
미국의 남자들은 이와 같은 고정관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비교군이 동양인과 서양인으로 확장되면 미국 남자들 역시 '수학을 못하는 사람'에 속하고 만다. 고정관념의 위협 때문이다. 고정관념은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무시한 채 그의 특성이나 능력을 특정 범주로 귀속시켜버린다.
인긴은 자신이 속한 특정 그룹 내에서 고정관념적 행동을 하는 경향이 높다. 평소엔 수학 시험을 잘 보는 여학생들도 같은 교실 안에 남학생이 있으면 수학 점수가 떨어진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내 연구실로 찾아온 여학생 중 상당수 역시 스스로를 '수학 못하는 사람'이라 단정하며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남자 교수의 수학 과목을 수강하던 중 특정 부분에 어려움을 느낀 여학생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그 교수의 방을 찾았다. 그런데 그녀에게 교수가 들려준 답이 놀라웠다. '이 과목은 수준이 높아 수강이 어려울 것 같으니 다른 전공을 선택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요한 것이다. 그 교수가 여학생에게 타 전공을 권한 이유가 수학 때문만은 아닐 수 있지만, 이런 유의 이야기를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자주 듣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불어 여학생의 수학 수업 포기 비율이 남학생보다 높은 것을 보면 이러한 고정관념의 범주화는 어느 정도 지지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고정관념이 자신감을 저하시킨다는 데 있다. '나는 수학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9자신의 수학 실력에 대한 모니터링) --> 그래서 수학을 포기하려고 한다(학습 방향을 설정하는 컨트롤)'의 구조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낮은 자신감은 자존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단순히 '수학이 어려워서 포기한다'를 넘어 '수학은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다'라는 결론을 내리면 메타인지적 판단을 아예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는 결국 자신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의 고정관념을 진실이라고 믿다 보면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로 믿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고정관념에 맞춰 행동하려는 습성이 있다. 실제로 나처럼 미국에서 자란 동양인 여성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니까 수학을 못하지만 동양인이니까 수학을 잘한다'가 바로 그것이다. 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출 경우엔 '여자라서 수학을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따라가고, '동양인'이라는 사실에 무게를 두면 '동양인이라서 수학을 잘한다'는 고정관념적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아 같은 고정관념 위협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고정관념은 언제든 아이의 자신감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모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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