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실적인 학습 환경을 무시하고 아이들이 자신의 속도대로 공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나도 잘 안다. 아이가 뒤처지거나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부모의 불안감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의 행복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부모다. 지금이라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마다 특성이 다르고 각자 처한 학습 환경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통하는 방안을 제안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있다. 아이들은 누구라도 자신에게 맞는 학습 방식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학습 과정에서 실수를 하거나 힘들어해도 혼자 결정할 수 있도록 부모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줘야 한다. 생선살을 직접 발라 입에 넣어주기보다는 아이 스스로 낚시를 하고 살을 발라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경험은 아이가 초등학교 생활을 시작할 무렵에 특히 중요하다.
나도 어릴 때는 토끼들의 세상을 훨씬 중시했다. 친구들과 경쟁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모두 다 배워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의 일이다. 당시 나는 여러 대외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사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수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지금 하고 있는 활동 중 두 가지를 그만두라'고 말씀하셨다. 분명 엄마가 그만두길 원하는 활동이 있었겠지만 엄마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대신 내게 선택권을 주셨다.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신 것이다. 어떤 활동을 그만둘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며칠간의 시간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활동을 그만두는 것은 아쉽지만 '나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큰 기쁨이었듯 싶다.
미국 교포들은 학교생활도 무리 없이 잘해내야 하고 공부, 운동, 음악, 미술도 능숙하게 해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학교에서는 미국 방식에 따라 매우 활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생활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한국 방식에 따라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는다. 이런 고정관념은 아이들에게 거북이가 아닌 토끼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일찌감치 '토끼가 아닌 거북이'라고 인정한 나조차도 토끼들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다.
토끼들의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거북이 같은 아이들을 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부모가 아이를 지지한다는 무언의 격려이자 메타인지를 키울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것과 같다.
영어 시험을 잘 본다는 것은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의 일이다 다른 학부모와 대화를 나누다가 나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다.
"초등학교 2~3학년 때까지 영어를 완벽하게 배우지 않으면 영어는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의 말에 조금 당황했지만 나는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원래 영어를 배우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걸요. 미국에서도 초등 2~3학년에 영어를 다 배우진 못해요."
"한국 실정을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어렸을 때 어느 정도 영어를 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수업조차 따라가지 어려워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수학과 과학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두 과목에 집중하기도 시간이 부족하답니다."
"내년부터는 아마 아이들의 영어 공부 시간을 많이 줄여야 할걸요."
처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는데, 한국에서 수많은 학부모와 대화를 나눈 결과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더불어 '영어를 마스터한다'는 것은 '영어를 잘하는 것'이 아닌, '영어 시험을 잘 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한국의 교육 과정이 이러한 학습의 정의와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메타인지의 중요성을 외쳐도 한국의 교육 과정이나 학부모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적 자체가 아닌, 진짜 공부를 위한 최적의 학습을 위해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면 학부모들도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지 모르겠다.
다음에서는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Andrew Wiles와 나의 경험을 통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메타인지가 어떻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서두르지 말고 그러나 쉬지도 말고
앤드루 와일스는 약 350년 동안 아무도 풀지 못했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Femat's Last Therem'를 완벽하게 증명해 낸 영국의 수학자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울프상 Wolf Prize 수학 부문을, 2016년에는 아벨상 Abel Prize을 수상한 바 있다.
운이 좋게도 나는 그를 직접 만나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열 살 무렵 우연히 들른 도서관에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당시 자신의 수학 실력으로 이를 증명할 순 없음을 깨닫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것을 증명해 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렇게 자신의 실력에 대한 메타인지 판단을 제대로 내린 뒤 그 역시 성적과 졸업 중심의 토끼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뛰어난 수학자인 와일스도 정규 교육 과정을 밟아야 하는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박사 논문을 쓸 때까지 자신의 머릿속에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풀고 싶다'는 욕구가 가득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토끼 세상에는 논문 작성과 학위 취득이 먼저였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을 마친 후 그는 본격적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매달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해내기까지는 그로부터 10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무려 20년 가까이 학교 공부를 했지만 막상 문제를 풀려고 보니 자신의 지식이 한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10년의 시간이 더 흘렀고 마침내 인생의 과업을 달성한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의 목표와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던 학교에서 배운 수많은 지식이 결국엔 페르마의 최후를 정리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와일스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한 후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우아했습니다. 페르마의 정리에 대한 증명을 발견한 첫날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잤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 그 증명을 재차 확인한 후 아내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찾은 것 같아!' 아내는 제가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그밖에 다른 무언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저를 바라보던 그녀가 물었습니다. '뭘 찾았는데?' 저는 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그걸 증명해 냈다니까!'."
결과적으로 와일스는 다른 수학자들과의 경주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목표가 경주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었음을 안다.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쉬지 않고 걸어온 결과였을 뿐이다. 그도 학교, 성적, 졸업, 박사 학위, 교수 임명 등의 현실은 무시하지 못했지만, 그 무게와 압박에 짓눌리기보다는 그 안에서 추구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천재라고 불리는 와일스도 이러는데 일반인인 우리야 오죽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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