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이, 완벽한 부모가 없는 것처럼 완벽한 선생님도 없다. 선생님도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벽한 시험 문제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시험을 볼 때마다 학생들에게 시험 문제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출제자인 나의 의도와 다른 의미로 문제를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면 토론을 통해 얼마든지 점수가 바뀔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교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나도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며, 조금 서툴러도 각자의 논리를 가진 아이들의 생각은 존중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모든 선생님이 나와 같이 않다는 건 알고 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모든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지는 못한다. 아이들과 토론하고 시험 점수를 수정하는 과정도 결코 쉽지 않다. 때문에 시험 문제를 제출할 때는 오류가 없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수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학생들이라면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인가?' '이 문제에 또 다른 착각은 없나?' 등을 꾸준히 점검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제출한 시험지를 보면서 혼자 웃음을 짓곤 한다. 벼락치기의 흔적이 여실히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쩌면 그 시험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제와 상관없는, 시험 바로 직전 아이들이 벼락치기로 본 내용이 시험에 그렇게 많은 적혀 있을 리 없다.
아이들 스스로 '공부한 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이유는 중고등학교 시절 본인들이 자주 사용한 메타인지이기 때문이다. 벼락치기 후 머리가 백지가 되는 경험을 무수히 해왔던 것이다.
오늘 배운 걸 얼마나 잊어버릴 것 같니?
시험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은 마음에 나는 가끔 수업에서 간단한 '가짜 기억 실험'을 한다. 전 수업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이틀 후 학생들에게 간단히 구술하게 하는 식이다.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학생들은 전 수업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대학생들도 이런데 초등학생이야 오죽하겠는가?
초등학생은 학습 경험이 적기 때문에 자신이 공부했던 것을 잊어버리는 과정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다. 선생님도 학생들에게 "오늘 배운걸 얼마나 잊어 비릴 것 같니?"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보통 시험이 끝나고 자신의 점수를 확인하면 공부도 끝난 것으로 생각한다. 시험 본 내용은 궁금해하지 않고 점수에만 관심을 쏟는다. 부모아 선생님도 이러기는 매한가지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시험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을 틀렸는지 확인하고 점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생인 우리 아이들에게 시험은 또 다른 학습이자 연습이며 실수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과정이 없으면 '시험'이 학습되지 않는 데다 틀린 문제는 실패로 끝날 뿐이다.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 학생들이 '내 인생은 끝났다' '나는 노력해도 안 된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 시험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아이가 '또 실수했다' '시험을 망쳤다'며 실의에 빠져있을 때 "그래서 영어를 또 망쳤어?" "반 아이들 점수는 어때?" 라고 묻는 부모가 많다. 이때 부모는 시험 결과보다 아이의 심리 상태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실력이 아니라 긴장과 불안 때문에 시험을 망치는 아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내 딸아이도 시험 전 긴장도가 높은 편이다. 시험을 잘 치르고 싶은 마음이 아이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이의 긴장을 낮춰주기 위해 엄마인 나도 노력을 기울이지만 아이는 좀처럼 여유를 찾지 못한다.
시험 전에는 어쩔 수 없지만 시험이 끝난 후에는 상황이 다르다. 부모의 가이드에 따라 아이의 긴장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시험은 잘 봤니?" "수학은 몇 점이나 맞았어?" 등 점수에 대한 질문 대신 "시험에 재미있는 질문이 나왔니?"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운 질문은 없었어?"라는 물음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점수가 아닌 '재미있는 질문 찾기'에 집중하며 서서히 긴장을 풀게 된다.
인지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시험은 궁극적으로 학습을 돕기 위한 행위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시험은 궁극적으로 학습을 돕기 위한 행위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시험은 어느새 무서운 것, 스트레스를 주는 것, 실수하면 안 되는 일종의 절차가 돼버렸다. 나와 타인을 비교하는 실력 테스트로 변모한 것이다. 시험의 정의가 달라지니 목표도 달라졌다. 시험은 원래 실수를 점검하기 위한 과정인데 이제는 시험에서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실수가 허락되지 않는 환경은 긴장을 불러온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는 그 누구도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단순한 성적만으로 자신의 노력을 평가받는다. 이것이 현재 시험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문제다.
두 번째 문제는 시험의 형식에서 비롯된다. 한국에서는 중요한 시험들이 거의 객관식으로 치러진다. 객관식 문제 풀이가 아이들의 공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잘 알다시피 객관식은 4~5개의 선택지 중 하나의 정답을 고르는 방식이다. 아이들은 정답을 찾기 위해 모든 문항을 하나하나 세심히 읽어나간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지문을 읽어나갈수록 아이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시험을 보기 직전 벼락치기로 읽었던 내용과 현재 시험 문제 내용이 헷갈리는 탓이다. 네 개의 보기 문항 중 정답이 아닌 세 개의 문항과 벼락치기로 살펴봤던 내용이 섞이면 아이들은 그야말로 혼란에 빠진다. 이럴 때는 보기 문항을 보기 전 시험지에 자신이 생각한 정답을 주관식으로 적어놓고 근사치에 가까운 문항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 이와 관련된 실험을 보자.
선택할 시간과 생각할 시간이 중요한 이유
한 실험자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의 짧은 실험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에 띄워지는 문제를 보며 객관식 시험을 치른다. 이때 실험자는 문제와 객관식 보기 사이에 '짧은 시간차 delay'를 두었다. 문제를 제출한 후 몇 초 있다가 보기 네 개를 보여주는 식으로, 학생들에게 정답을 유추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 결과 학생들은 일반 객관식 시험보다 훨씬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시험은 또 다른 형태의 학습이다. 이 학습에서 효과를 보고 싶다면, 아이가 시험 문제를 읽고 보기를 확인하기 전에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시험지에 쓰게 하자. 그다음에 제출된 보기 중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항복을 선택하게 하면 된다. 이런 방식은 학생들에게 '문제가 어렵다'라고 느끼게 하고, 실수할 확률을 높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 스스로 문제의 정답을 유추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에 분명하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문제와 선택지가 동시에 출제되는 객관식 시험은 아이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메타인지 활성을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생각할 시간과 선택할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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