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이가 스케이트를 배운다고 가정해 보자. 아이는 지금 빙판 위에 제대로 서는 것도 힘겨워한다. 이때 아이에게 어떻게 이야기해 줄 것인가? 아마 대부분의 부모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까?
"스케이트를 하루아침에 잘 탈 수는 없어. 제대로 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많은 연습을 해야 한단다."
이런 대답이 가능한 이유는 부모가 아이를 스케이트 선수로 키우려고 마음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취미로 배우는 운동이니 속도가 느리거나 실수가 많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다. 공부도 스포츠와 똑같은 '학습'이다. 스케이트를 배울 때와 같이 오랜 시간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데 같은 학습임에도 유독 공부에서의 실수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앞선 실험에서 우리는 학습 과정에서 더 많은 실수를 했던 유추의 집단의 시험 점수가 더 높음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아이의 실수를 여전히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를 증명하는 실험 하나를 더 살펴보려고 한다.
실험자는 피험자인 학생들을 읽기 집단과 유추 집단으로 나누고 그들에게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나오는 여러 동의어들을 제시했다. 앞선 실험과 마찬가지로 두 집단 모두 실험자가 제시한 단어를 암기해야 했다.
실험자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학습한 두 집단을 대상으로 '메타인지 판단을 위한 자기평가 설문'을 실시했다. '이제 곧 보게 될 시험에서 방금 학습한 단어를 얼마나 잘 기억할 것 같은가?' 이는 학생들에게 제시된 내용을 얼마나 잘 학습했는지, 얼마나 회상해 낼 수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메타인지 판단의 결과를 보면 읽기 집단의 학습 자신감은 유추 집단의 학생들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정작 시험에서는 유추 집단의 성적이 더 좋았다. 실패 없는 쉬운 학습 과정을 거친 유추 집단의 자신감은 높았지만, 상대적으로 어려운 학습 과정을 거친 유추 집단의 성적이 더 높았던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이들이 벼락치기를 선호하는 이유
한국의 학교 수업은 선생님의 일방적인 강의가 중심이다. 시스템 자체가 아이들 스스로 회상하거나 정보를 유추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이는 아이들을 달콤한 착각에 빠트리는 교육 방식이다. 수업 시간에 편히 앉아 선생님의 목소리만 듣고 있으면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내용을 잘 알아듣고 있으니 나는 제대로 공부하고 있다'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앞서 이야기했던 벼락치기 역시 읽기 학습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쉬운 학습 과정이다. 어제 공부하고 오늘 잊어버리는 벼락치기와 달리, 끊임없는 회상을 통해 학습한 내용을 기억해내는 분산 학습은 결코 만만치 않은 공부법이다. 학습 방법에 따라 학생들을 크게 '벼락치기 & 읽기 집단' vs. '분산 학습 & 유추 집단'으로 나눠봤을 때 후자의 결과가 훨씬 좋다는 사실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읽기 중심의 벼락치기 학습법을 선택하는 학생들은 여전히 많다. 이를 증명하는 한 가지 실험을 살펴보자.
한 실험자가 초등학교 1~3학년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학습 방법을 제안했다.
1. 몇 번에 걸쳐 조금씩 나누어 공부하기
2. 한자리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하기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든 아이들이 공부해야 하는 총 시간은 똑같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들은 한 시간씩 여섯 번에 걸쳐 공부하는 쪽을, 어떤 학생들은 여섯 시간 내내 공부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얼마든지 천천히 공부할 선택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벼락치기를 선호했다.
그 이유를 나는 두 가지 가능성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벼락치기가 학습 내용을 쉽게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메타인지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학생들에게 벼락치기는 너무도 익숙한 학습 방식이다. 이미 많은 학생이 빠른 속도의 학습을 더 좋은 것으로 여기는 환경(부모 또는 또래의 영향)에 노출되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장기 기억력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쉬운 방법은 학습 후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다음의 실험을 보자.
질문의 방향을 바꿔라
한 실험자가 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학습시켰다. A 집단에게는 하루 또는 1주일 후 학습 내용을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가?'를 물었고, B 집단에게는 하루 또는 1주일 후 학습 내용을 얼마나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가?'를 물었다.
'학습 내용을 잊어버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 학생들은 자신들이 상당량의 학습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반면 '학습 내용을 기억할 가능성'을 생각한 아이들은 1주일 후에도 기억에 차이가 없을 거라고 믿었다.
이 사실은 메타인지 착각을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고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공부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잘 기억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더 '잘 잊어버릴 것인가'를 염두에 두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배운 것보다 잊는 게 많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많은 실험 결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이 학습한 내용을 '잘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아이들은 수업이 끝난 후 '내가 이 내용을 잊어버릴까?' '어느 시점부터 수업 내용을 회상하지 못할까?' 같은 질문보다 '내가 현재 잘 이해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더 익숙하다. 학교에서 혼자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다. 책상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거나 바로 눈앞의 정보를 외우기만 하는 공부법으로는 기억을 인출하는 연습을 할 수 없다. 이런 학습 방법 자체가 실패를 경험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부모와 아이 모두 '학습한 내용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보다 '얼마나 잊어버릴까?' '얼마나 까먹을까?' 라는 판단을 먼저 하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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